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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대당(對唐)전쟁 시 해상전역


1. 서언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삼국을 통일함으로써 우리민족 최초의 단일국가가 탄생하게된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 신라는 또 하나의 전쟁을 치루고서야 비로소 완전한 통일국가가 되었는 바, 이는 동맹국이었던 당나라와의 전쟁이었던 것이었다.

나·당동맹 체결 당시 당 태종은“백제의 영토와 평양 이남의 고구려 땅은 신라에게 준다”라고 김춘추에게 약속했다. 그러나 약속을 저버리고 막강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한 강대국의 위세로 멸망한 백제, 고구려와 같이 신라도 속국으로 삼고자 하는 당나라에 대하여 신라는 7년간의 대당전쟁에서 군사적 실력으로 당당하게 당나라 군사를 축출하고서야 자주를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이 전쟁에서 신라는 지상군뿐만 아니라 수군의 효과적인 작전으로 당나라 군대를 곤경에 빠트려 결국은 군사적 승리를 쟁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본고에서는 신라수군이 이 전쟁에서 어떠한 활약을 통하여 전쟁의 승리에 기여했는가를 살펴보고, 현재의 우리 해군에게 주는 시사점을 도출해 보고자하는 것이다.


2. 나·당연합군에 의한 백제, 고구려의 멸망

가. 정세

고구려, 백제 두 나라와 적대관계로 국운을 걸고 싸우기가 어려워진 신라는 김춘추와 김법민 부자를 당에 보내어 나·당군사동맹을 체결하는 데 성공하였다.

한편, 수에 이어 고구려를 정복하는 데 실패를 거듭한 당의 고종은 고구려에 대한 정복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당 고종은 655년부터 고구려에 대한 침공을 시도하지만, 고구려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쳐 아무런 소득없이 회군하고 만다. 여기서 당은 신라의 요청에 따라 고구려보다 먼저 그 후방에 있는 백제를 공략하여 후방기지를 만들고 고립된 고구려를 전후에서 협공하자는 전략으로 변경하면서 신라와 연합작전을 전개하기로 한 것이다. 이에 따라 동북아의 국제정세는 고구려·백제·일본으로 이어지는 남·북연합세력과 신라·당으로 이루어진 동서세력의 대결 국면으로 돌입하게 된 것이다.


나. 백제의 멸망

당 고종은 660년에 소정방(蘇定方)을 총지휘관으로 임명하고 병력 13만을 동원하여 백제를 정복할 것을 명령하였다. 소정방이 거느린 당군은 산동반도를 떠나 황해를 건넌 후 남하하여 6월에 아산만의 덕적도에 도착하여 신라의 왕자 법민이 인솔한 신라 전선 1백 척과 합류하였다. 나·당 양국의 지휘부는 여기서 백제 침공에 대한 연합작전 계획을 토의하여 결정하게 되었다. 즉 당군은 바다 길로 남하하여 백강(금강하류)으로 들어가고, 신라군은 육로로 백제의 동쪽 국경선을 돌파하여 사비성(부여)으로 진출하여 7월 10일 사비성에 대한 연합공격전을 전개하기로 한 것이다.

소정방의 당군이 백강 입구인 기벌포(伎伐浦)에 이르렀으나, 의자왕은 그곳을 지키지 않고 수군으로 하여금 사비성 부근의 백강을 지키게 하고 육군에게는 그 강변에 진을 치게 하였다.

백제의 수군을 파하면서 백강을 거슬러 들어가 사비성 부근에 상륙한 소정방의 보병과 황산벌에서 개백의 5천 결사대를 격파하고 도착한 김유신의 5만 신라군이 도성에 육박함에 따라 백제군은 총력을 다하여 항전하였으나 1만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패하고 말았다. 13일 사비성을 지키고 있던 왕자 융이 성문을 열고 항복하였고, 18일에는 웅진성에서 왕과 태자도 모두 항복하였다. 이리하여 678년의 사직을 이어온 백제는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다. 고구려의 멸망

신라와 당이 백제를 집중 공격한 것은 그 목적이 단순히 백제의 격멸에 있는 것이 아니고, 동방의 강자인 고구려를 격멸하기 위한 예비작전이었던 만큼, 백제를 격멸시킨 후 나·당 연합군이 고구려에 대한 침공을 계획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661년 4월 백제를 정복한 소정방의 원정군은 수륙양면으로 고구려를 향하여 출전하였다. 이에 부응하여 신라는 무열왕의 뒤를 이은 문무왕이 김유신 장군을 파견하여 당과 합동작전을 전개하게 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의 조직적인 저항과 연합, 합동작전의 차질로 나·당 연합군의 1차침공은 실패하고 말았다.

기회를 노리고 있던 당 고종의 지시로 667년부터 당수륙군의 본격적인 제2차 고구려 침략전이 시작되었다. 이때 신라의 김가실이 지휘하는 수군도 당의 수군과 같이 행동하였으며 또한 육상으로는 김인문 등이 신라 육군을 거느리고 북진하여 당의 이세적 군과 합류하여 연합작전에 들어갔다. 이때 동원된 신라군은 총 20만 명이었다.

고구려군은 남·북으로 그리고 수·륙으로 우세한 나·당 연합군에게 제압 당한 후라 아무리 성이 견고한 도성이라 하지만 평양성 하나로는 버틸 수가 없는 일이었다. 양식과 무기가 떨어지고 부상자가 속출하니 성의 함락은 시간문제라고 본 고구려군은 백기를 들고 당에 항복함으로써 결국 668년 9월 12일에 평양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이리하여 한반도와 만주일대를 호령하던 고구려는 28대 보장왕을 끝으로 705년 만에 무너지고 말았다.


3. 신라의 대당 해전

가. 배경

신라는 당과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다음, 한반도내의 백제와 고구려의 고지를 놓고 당과 대결하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당은 신라와 연합작전으로 백제와 고구려를 정복한 다음에는 그 전공을 모두 자기네 것으로 돌리고 두 나라의 땅을 송두리채 자기들의 영지로 만들려고 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라까지 자기들의 지배하려 하였다. 당은 백제 점령지에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두고, 고구려 점령지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두었을 뿐만 아니라, 신라왕을 계림도독(鷄林都督)으로 임명하여, 결국은 신라도 멸망한 백제 및 고구려와 동등한 위치로 전락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정복하여 삼국을 통일하는 데 당을 이용하였을 뿐이었기 때문에 당의 이러한 처사를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신라는 당에 대하여 부당성을 들어 항의하는 한편, 고구려와 백제 유민들의 대당 저항운동을 사주하고 원조하였다. 그리고 당에서 그 뜻을 굽히지 않고 많은 병력을 출동하여 침략자로서 야욕을 들어냄에 따라, 신라는 본격적으로 해륙상의 병력을 출동하여 당군에 대한 소탕전을 전개하니 이제는 신라의 대당 전면전이 한반도 내에서 벌어지게 되었다.


나. 전쟁 경과

1) 초기 전투

우선 신라는 백제지역의 당군을 공격하여 671년에는 사비성을 함락시켜서 웅진도독부를 축출하고 대신 소부리주(所夫里州)를 설치하였다. 이로서 신라는 백제 고토를 당의 군정으로부터 해방시키고 그 곳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당의 고종은 이를 문책하기 위하여 설인귀의 수군을 출동시켰는데, 신라의 수군과 백강 입구에서 조우하여 신라군에게 대패하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문무왕 11년 10월 6일에 신라의 김당천 부대가 출동하여 당의 군량수송선 70여 척을 격파하고 적 수송부대 지휘관 랑장겸이대후를 비롯한 병사 100여 명을 사로잡았는데, 이때 물에 빠져 죽은 당 수군의 수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옛 백제지역에서 고전중인 당군을 해상으로 지원하고자 한 설인귀의 계획은 큰 차질이 발생한 것이다.

우세한 군사력으로 신라를 제압하기로 한 당에서는 고간, 이근행 등이 지휘하는 육상부대들의 수만의 병력으로 임진강선까지 밀고 내려왔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신라의 수군은 육군과 협력하여 당의 침략군을 분쇄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게 된다, 즉, 673년 8월에는 대아찬 김철천이 왕명으로 병선 1백 척을 이끌고 서해에 수군 근거지를 설치함으로써 제해권을 장악하고 수륙병진을 기도하는 당 수군의 활동을 크게 위축시켰다. 이 조치는 당의 수군이 서해안을 통해 당 육군에 보급을 지원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다.


2) 매소성 전투

이러는 동안 당은 신라에 대해 강·온양면의 방법으로 저항을 잠재우려 했으나, 신라 역시 현실주의에 입각하여 가급적 정면충돌을 피하고 화전양면 정책으로 대응하면서 실질적인 영토 확장을 추구하였다. 674년 당 고종은 최종적으로 유인궤를 총지휘관으로 한 10만 명의 대병을 출동시켜 대규모적인 침략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신라 장군 문훈은 수륙군을 지휘하여 한강 하구 일대에서 설인귀가 지휘하는 당 수군을 맞아 싸워 크게 개가를 올렸다. 이 싸움에서 신라군은 적 병선 40척과 군마 1천 필을 노획하고 적병 1,400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리고 신라군은 계속된 육상전투인 매소성(買肖城) 전투에서 이근행이 지휘하는 20만 당군과 싸워 수만 명 사살, 군마 3만 마리와 3만 명분의 무기와 장비를 노획하는 등 적의 주력을 격파하는 혁혁한 전과를 얻음으로써 지상전에서도 승기를 잡게 되었다. 이어 신라군은 임진강 근처에서 18차례의 전투 끝에 육지에서 당군을 완전히 후퇴시켰다.

육상전투의 결정적인 승기를 장악한 매소성 전투에서 신라가 이길 수 있었던 가장 큰 원인은 십여 만의 당나라 대군에 필요로 하는 다량의 군수물자를 수송하는 수군을 신라의 수군이 사전에 해전에서 격파함으로서 당군의 군수물자 결핍이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즉 가장효과적인 수·륙합동작전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675년 9월에는 백수성에 육전대를 상륙시키기 위해 침공한 설인귀부대에 대하여 신라는 수·륙양면으로 공격하여 이를 물리쳤다. 육상에서는 신라장군 문호가 적의 상륙군을 격퇴했으며, 해상에서는 적선 40여척을 나포하고 적병 1,400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거두었던 것이다.


3) 기벌포(伎伐浦) 해전

거듭되는 패전에도 불구하고 당나라는 또다시 설인귀가 지휘하는 원정함대를 편성하여 676년 11월에 옛백제지역으로 침공하였다. 침공 소식을 접한 신라는사찬 김시득이 지휘하는 수군이 출동하였다. 소부리주기벌포에서 설인귀가 지휘하는 당 수군과 조우하여 격전을 벌이게 되었다.

이때 신라수군은 첫 교전에서는 패하였으나 곧 바로 전열을 가다듬고 기동전에 유리한 외해로 적을 유인하여 이후 무려 22회나 되는 끈질긴 접전을 치룬 끝에 대승을 거두게 되었던 것이다. 이 때에 적병 4천 명을 살상하는 전과를 올렸다.

기벌포 해전의 승리는 나당전쟁에서 정규수군 간의 교전으로서 그 규모와 치열성에 있어서 가장 의미가 있는 해전으로서 신라수군이 외해에서 기동전을 전개할 수 있는 전투력과 전술적, 기술적 우세를 시위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당이 한반도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평양의 안동도호부를 요동의 신성으로 옮기게 된 것은 이 기벌포 해전에서 패전한 데 기인한 것이다.

신라는 청천강 이남의 지역을 확보한 이후 당과의 불편한 관계를 해소하기 위하여 당에게 사과하는 외교적 조치를 취하여 당의 체면을 세워 주는 한편, 당이 한반도에 간섭하지 않도록 함으로써 명실공히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였다.


4. 결언

삼국 중에 제일 소국인 신라가 강국인 백제와 고구려를 정복하고 나아가 실력으로 당군을 한반도에서 축출하여 삼국을 통일함으로서 우리의 역사가 한민족 단일 국가로 성립될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 백제는 해상방어를 소홀히 한 결과로 소정방군이 바로 수도인 사비성을 지향한 것이 백제에게는 결정적이었다. 여기서 백제 수군이 당군을 금강에 진입하지 못하도록 방어전략을 구사했으면 이후의 백제 부흥군 운동 등의 활동으로 보아 상황은 크게 달라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고구려 또한 60여 년간에 걸처 수·당의 수륙병진의 피해를 번번히 겪으면서도 해상방위에 소홀히 한 결과, 국가 방어의 핵심인 수도 평양이 집중 공격을 당함에 따라 종국에는 나라를 잃는 데까지 이른다.

이에 비하여 신라는 당군과의 해륙상 연합작전을 가진 짧은 기간 중 수군의 활용에 대한 경험을 잘 살려결국은 당의 수군을 물리치고 한반도의 통일을 이루는데 크게 이바지한 것이다. 즉 대당전역에서 신라의 수군은 육군과 협력하여 당군을 구축하는 데 있어서 당의 수륙작전을 배워 이를 역이용함으로써 당군을 격파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신라는 당의 상투수단인 상륙작전을 간파하고 또한 백제와 고구려의 실패를 교훈삼아 서해안의 해상방위태세를 미리 강화하였으며, 또한 당의 군량수송선을 집중 차단함으로써 당의 육군이 어려움에 처하게 만들었다. 또한 필요시는 육군을 지원하여 상륙작전을 전개함으로써 한반도에서 당군을 축출하는 데 기여하였으며, 종국에는 당의 정규수군과 해상 결전에서 당당히 이를 물리침으로서 전쟁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국가인 우리나라는 해상으로부터의 침공에 매우 취약한 지정학적 위치에 있는 것이다 . 나당전쟁에서 강대국의 침공을 물리치는데 신라 수군의 활약이 지대했다는 사실은 주변국의 해상 위협이 증가되고 있는 현재의 한국해군에 주는 시사점이 크다 할 것이다.

< 출처 : 해군본부 >
2005-01-31 16:45:02 프린트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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