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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군사문화재 순례 - 병자록


국가의 운명을 건 전쟁에서의 패배는 그 민족의 역사에 지울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남기게 마련이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참혹한 패전이 바로 병자호란(1636~1637)이다. 통일신라 이후 국왕이 적진에 무릅을 꿇고 항복한 사례는 병자호란이 유일하다.

통한의 역사로 기억될 수밖에 없는 병자호란의 전쟁 경과와 전후 사정을 정리한 책이 ‘병자록’(丙子錄·사진)이다. 병자호란판 난중일기라고 할 수 있는 ‘병자록’의 저자는 당시 형조참의(법무부 차관보)이자 군량조달 책임자였던 나만갑(羅萬甲·1592~1642)이라는 인물이다. ‘병자록’의 원본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으나 붓으로 베껴 쓴 필사본은 장서각과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돼 있다.

일명 병자남한일기(丙子南漢日記)로도 불리는 ‘병자록’은 1636년 12월12일 청나라의 침공 소식이 조정에 전해진 날로부터 시작, 청군이 철수한 2월8일까지 57일 동안 벌어진 사건을 일기체의 기록으로 담고 있다.

적에게 포위돼 산성 안에서 고립돼 있던 나날, 척화파와 주화파의 격렬한 대결, 전국 각지에서 벌어진 전투와 패전, 국왕 인조가 청 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항복 예를 행하는 장면 등이 ‘병자록’에는 한 편의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일기와 별도로 앞부분에는 후금의 성립과 정묘호란, 청나라의 성립 과정 등이 정리돼 있고 일기 뒷부분에는 병자호란 중 활약한 조선 장수, 전쟁 중 절의를 지키며 죽은 사람, 병자호란에 책임이 있는 인물들에 대한 평가 등을 수록해 전쟁의 전체 양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포위된 국왕을 구원하기 위해 출동한 지방 군대가 남한산성 주변에서 격전 끝에 패퇴하는 과정에 대한 묘사도 생생하다. 특히 조총으로 무장한 4만 병력의 경상도 군대가 수백 내지 수천에 불과한 청나라 기병에게 패전하는 쌍령전투의 전후 과정은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청군이 조선의 젊은 부녀자들을 강제로 끌고 가면서 버려진 아기들이 얼어 죽어 청나라 군영 옆에 시체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독자의 할말을 잃게 만들기도 한다.

항복 과정에서 오고 간 청나라와 조선의 외교 문서 등은 내용이 너무 치욕스러워 실록에 그대로 옮기지 않은 경우가 많지만 ‘병자록’에는 생생히 전문을 전하고 있다. 특히 ‘병자록’에 게재된 청 태종의 국서에는 음미할 만한 대목이 적지 않다. 청과의 맹약을 깨고 명나라를 선택한 국왕 인조의 선택에 대해 청 태종은 직설적인 불만을 표시한다.

“짐이 이미 너희를 아우로 대했는데도 너는 갈수록 배역해 청나라를 원수로 만들어 백성을 도탄에 빠뜨려 버렸다. (중략) 이제 내가 대군을 이끌고 와서 너희 8도 강토를 무찌르려 하는데 네가 부모처럼 섬기는 명나라가 장차 너희를 어떻게 구원하는지 보고 싶다. 자식의 위급함이 경각에 달렸는데 부모된 자가 어찌 구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네가 스스로 무고한 백성들을 물불 속으로 몰아넣은 것이니 억조중생들이 어찌 너를 탓하지 않으랴.”

비록 침략자의 억지 논리이기는 하지만 한 국가의 존립을 위해 외교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절실히 보여 주는 문구가 아닐 수 없다.

< 출처 : 국방일보 김병륜, 2006. 2. 21 >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2006-02-21 18:16:09 프린트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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