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일보의 협조로 제공되는 자료입니다.
◆ 무단전재.복제시에는 관련법규에 의거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
삭제 수정 편집부 님이 664 번째 작성하신 글입니다 편집부 님께 메일을 보냅니다  
홈으로쓰기답변하기목록으로
Access 904
안보100대사건 <7> 한강교 폭파


북한군의 기습 남침이 시작된 지 사흘째인 6월27일 전세가 더욱 불리하게 전개되면서 수도 서울이 위협받게 됐다. 이날 새벽 대통령이 특별 열차 편으로 대전으로 떠났고 비상 국무회의에서는 정부를 수원으로 이동하기로 결정한다.

군은 서울을 사수하기로 하고 창동 방어선에 가용한 전력을 집중시켰으나 이 방어선이 붕괴되자 채병덕 총참모장은 서울 사수를 포기하기로 하고 27일 11시 긴급 회의를 열어 육군본부의 서울 철수와 함께 한강상의 교량을 폭파하기로 결정한다.

폭파 시기는 북한군이 서울에 진입한 2시간 뒤로 잡았다. 이 자리에 참석한 수도경비사령관 이종찬 대령은 서울 시민의 피난 조치도 강구하지 않은 채 군부가 먼저 철수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특히 서울 시민과 서울 북쪽에서 전투 중인 국군의 유일한 퇴로인 한강교를 조기에 폭파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며 이를 반대했다. 그러나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육군본부는 철수를 개시, 시흥에 있는 육군보병학교로 이동했다. 그리고 공병감 주도 하에 임무를 받은 각 폭파조들은 27일 12시부터 오후 3시30분 사이에 한강 인도교와 경부선 철교, 경인선 철교에 폭파 장치를 완료했다.

바로 그날 미 군사고문단 라이트 대령이 맥아더 극동군사령관이 곧 한국 전선에 전방지휘소(ADCOM)를 설치한다는 소식과 함께 육군본부를 서울로 복귀시킬 것을 권고해 왔다.

이에 따라 채총참모장은 육본을 다시 용산으로 복귀시키고 한강교 폭파를 연기한 다음 미아리와 회기동을 연결하는 선에서 서울을 사수키로 하고 한강상의 각 교량에 설치했던 폭발물도 일부 제거, 차량과 열차 통행에 지장이 없도록 조치했다. 그리고 한강교 폭파 지휘 계통도 총참모장 - 참모부장(김백일 대령) - 공병감 - 공병학교장으로 확정했다.

그러나 미아리 방어선에서 공방전이 전개될 무렵인 27일 밤 11시30분에 다시 폭파 준비 명령이 하달됐고 한밤중인 28일 1시45분을 전후해 돈암동에 북한군 전차가 진입했다는 보고를 받은 채총참모장은 공병감에게 지체 없이 한강교를 폭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6월28일 2시30분에 한강교는 천지를 뒤흔드는 폭음과 함께 절단됐다. 그로부터 1시간30분 뒤에 광진교도 폭파됐다. 그러나 경인선 상행 철교와 경부선 철교는 일부만 손상시켰을 뿐 불발로 끝났다.

이로 인해 당시 한강교를 건너던 500~800명에 이르는 인원과 차량 50여 대가 피해를 입었으며 서울 지역에 투입됐던 국군 5개 사단과 지원부대의 퇴로가 차단돼 차량 1318대를 비롯한 중장비와 공용화기들을 한강 이북에 유기할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상황이 발생하게 됐다.

또 국군의 주력 4만여 명의 병력이 뿔뿔이 흩어지는 엄청난 결과를 초래했을 뿐만 아니라 한강교의 조기 파괴로 피난 기회를 상실한 많은 시민은 적 치하에서 엄청난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기실 북한군 전차가 한강대교 북단에 출현한 것은 교량이 폭파된 지 7시간 반이 지난 28일 오전 10시쯤이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폭파 시기를 적확히 선택하지 못한 군 지휘부의 조치에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는 것이다.

한강교의 조기 폭파로 엄청난 피해가 발생한 데 대한 국민들의 분노가 치솟자 군은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뒤늦게 폭파 관계자들을 군사 재판에 회부했다. 이 재판에서 공병감 최창식 대령에게 한강교 조기 폭파의 책임을 물어 사형을 선고하고 1950년 9월21일 부산 교외에서 형이 집행됐다.

그러나 최대령의 사형이 집행된 지 14년 후인 64년, 유족인 부인이 제기한 항소심에서 그의 조치는 상관 명령에 복종한 것이라고 판단, 무죄가 선고됐다.

< 김영이 군사평론가 >

< 출처 : 국방일보, 2006. 2. 15 >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2006-02-15 22:37:31 프린트하기
홈으로쓰기답변하기목록으로
관리자환경설정 Total 670 Page 1/23
번호 제 목 작성일
670    우리부대역사관 <9> 육군오뚜기부대 역사관 2006-03-02
669    안보100대사건 <9> 9·28 서울수복 2006-03-02
668    패전속 승리학 <31> 아눌라 전투 2006-02-27
667    전사속 신무기 - 獨 판저 파우스트 2006-02-27
666    세계의 군대 - 중국의 집단군 2006-02-27
665    우리부대역사관 <8> 공군10전비 ‘취용관’ 2006-02-22
664    안보100대사건 <8> 유엔군 한국전 참전 2006-02-22
663    한국의 군사문화재 순례 - 병자록 2006-02-21
662    현충시설탐방 <4> 딘 헤스 대령 기념비와 전송가 2006-02-21
661    베트남정글영웅 <8> 최범섭 중령과 구정 공세 2006-02-21
660    패전속 승리학 <30> 하틴 전투 2006-02-20
659    전사속 신무기 - 독일 Me262 전투기 2006-02-20
658    세계의 군대 - 중국의 대군구 2006-02-20
657    안보100대사건 <7> 한강교 폭파 2006-02-15
656    우리부대역사관 <7> 육군특수전사령부 ‘특전역사관’ 2006-02-15
655    한국의 군사문화재 순례 - 신전자취염초방언해 2006-02-14
654    현충시설탐방 <3> 심일 중위와 육탄 5용사 2006-02-14
653    베트남정글영웅 <7> 송서규 대령과 닌호아 전투 2006-02-14
652    패전속 승리학 <29> 산 하씬또 강 전투 2006-02-13
651    전사속 신무기 - 유도폭탄 프리츠-X 2006-02-13
650    세계의 군대 - 중국 四總部 2006-02-13
649    우리부대역사관 <6> 해군사관학교 박물관 2006-02-08
648    안보100대사건 <6> 6·25 전쟁 2006-02-08
647    현충시설탐방 <2> 故 이인호 소령 동상 2006-02-07
646    베트남정글영웅 <6> 짜빈동전투 신원배 중위 2006-02-07
645    한국의 군사문화재 순례 - ‘화성성역의궤’ 2006-02-07
644    패전속 승리학 <28> 리틀빅혼 전투 2006-02-06
643    전사속 신무기 - 트라이림 2006-02-06
642    세계의 군대 - 중국 중앙군사위원회 2006-02-06
641    우리부대역사관 <5> 육군맹호부대 2006-02-01
[1] [2] [3] [4] [5] [6] [7] [8] [9] [10] [last]
홈으로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