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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대한민국의 자유를 위해 활약한 F-51D 무스탕 (1)


■ 한국공군의 탄생과 한국전쟁


우리 공군은 1920년 1월 20일, 노백린 장군이 미국 캘리포니아에 윌로우즈 한인 비행학교를 설립하면서 태동하였다.

이후 1945년, 감격스러운 광복을 맞이한 우리나라는 다시는 치욕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다짐하에 국방경비대를 창설, 군사력을 정비하기 시작한다.

1948년 4월 1일에는 최용덕 장군을 비롯한 7인의 간부들이 조선경비대 보병학교에 입교하여 육군소위로 임관, 육군 산하의 항공부대를 결성하였고, 1948년 9월 13일 미7사단으로부터 L-4 연락기 10대를, 12월 23일 L-5 연락기 10대를 각각 인수하여 영공 방위의 임무에 나서게 된다.

우리 공군은 1949년 10월 1일 대통령령 제254호『공군본부 직제』에 의거 육군으로부터 독립, 1,600명의 병력과 20대의 연락기로 영공 방위 임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이후 ’50년 5월, 국민의 성금을 모아 캐나다로부터 T-6 건국기 10대를 도입한 우리 공군은 6.25 전쟁 전까지 총 병력 1,897명, 항공기 22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운명의 ’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대규모 남침이 시작되자 한국공군은 적은 병력으로나마 적군을 공격하기 위해 당일 오후 6시, 10대의 T-6 항공기가 각각 국산 폭탄(15kg) 8∼10개와 수류탄을 싣고 날아올라 후방석 관측사가 폭탄을 손으로 떨어뜨려가며 적을 공격하였다. 이러한 한국공군의 공격은 당시 보유하고 있던 274발의 폭탄이 모두 소모된 6월 27일까지 계속되었다.


■ 바우트 원(Bout one) 프로젝트와 무스탕의 등장

북한군의 남침이 시작되자 주일미군 사령부는 즉시 작전 가능한 미공군기들을 출동시켜 북한군의 남침을 저지하는 동시에 한국정부가 이전부터 요청해오던 전투기의 원조요구를 드디어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이 계획은 미 공군에 의해서『바우트 원』(한판승부)라는 이름이 붙여졌으며 전쟁이 시작된 지 하루만인 6월 26일 바로 실행에 옮겨졌다.

이 명령에 따라 미공군측은 2차 세계 대전중 최고의 프롭 전투기라는 찬사를 받은 바 있는 F-51D 무스탕 전폭기들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일부 퇴역되었던 기체를 정비하고 주 방위군으로 공여된 기체를 모아 실험해 본 결과 미 공군은 이 기체가 한국전장에 적합한 기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스탕은 항속거리가 길었으며 상태가 좋지 않은 남한의 비행장에서도 작전이 가능할 만큼 억세고 튼튼했고, 지상공격을 위한 무장도 충분히 탑재할 수 있었다. 더구나 북한군이 보유한 야크 전투기는 무스탕만으로도 잡아낼 수가 있었으며 대부분의 미군 조종사들이 이 기종으로 비행을 충분히 경험했었기 때문에 다시 기종 전환 교육이 필요 없었다.

한편 미군은 한국군에 단발 프로펠러 전투기를 능숙하게 조종할 수 있는 조종사 10명을 일본으로 보내라고 요청하였고 김정렬 참모총장은 즉시 T-6 건국기들을 조종하고 있었던 최고 조종사들인 이근석 대령과 김영환 중령을 비롯한 10인의 조종사들을 선발하여 6월 27일 일본의 이타쯔게 기지로 파견해서 미 공군의 지휘하에 기종전환 훈련을 받도록 했다. 이러한 과정 모두가 불과 2일만에 추진될 정도로 당시의 전세는 급박했다.

6월 29일에는 미국의 맥아더 원수가 전황을 시찰하기 위해 수원 비행장으로 들어왔다. 이때 맥아더 원수를 호위하기 위하여 4대의 무스탕기가 처음으로 한국 상공에 나타났으며 때마침 이날 수원 비행장 상공에 나타난 북한의 야크 전투기를 격추시킴으로써 무스탕의 한국전 첫 Kill(적기 격추)이 이루어지게 된다.

한편 미공군은 한국공군 조종사들의 훈련을 맡고 한국공군을 양성하기 위해 제6146 군사고문단을 창설했으며 한국공군 훈련부대는 작전명을 따서『바우트 원 대대(Bout one squadron)』라고 불리게 되었다(후일 한국에서는 백구대대라고 불린다).

’50년 6월 27일 창설된 이 바우트 원 대대는 일본의 이타쯔게 기지에서 기종전환 훈련을 받던 도중 급박해진 전쟁 상황에 의해 7월 2일 대구비행장으로 귀국, 다음날인 7월 3일에 미 24사단을 근접 항공 지원하는 첫 출격에 나섰다. 하지만 아직 숙련되지 않은 한국 조종사들은 별다른 전과를 세우지 못하였고, 심지어 7월 4일에는 한국 조종사들 중 최고의 비행기술을 가졌다는 이근석 대령이 대공포화에 피격되어 전사하는 일까지 발생하였다.

딘 헤스 소령은 이대로라면 며칠 이내에 바우트 원 대대가 전멸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는 절대로 미군 교관 조종사들은 전투에 참가하지 말라는 지시를 무시하고 스스로 전선 상공으로 전투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한국 조종사들과 함께 출격하기 시작했다.

며칠 뒤 필리핀과 일본의 미군부대에서 급히 정비를 받은 10여 기의 F-51D 전폭기들이 24사단을 지원하기 위해서 대구로 속속 날아왔다. 그리하여 바우트 원 대대의 한국 조종사들은 미군 소속의 F-51D 전폭기들과 같이 작전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 조종사들이 최선을 다해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대전은 7월 20일 북한군에게 함락되고 말았으며, 이 기간 동안 1기의 F-51D가 손실되어 바우트 원 대대에는 F-51D가 8기만 남게 되었다.

< 출처 : 월간공군 2004년 6월호 >

2004-06-14 18:21:06 프린트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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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950년, 대한민국의 자유를 위해 활약한 F-51D 무스탕 (3) 2004-06-16
2    1950년, 대한민국의 자유를 위해 활약한 F-51D 무스탕 (2) 2004-06-15
1    1950년, 대한민국의 자유를 위해 활약한 F-51D 무스탕 (1) 2004-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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